연중 제24주일 나해(마르 8, 27-35)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지난 주일 복음은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시는 대목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피해 숨어다니시면서도 당신을 원하는 이들에게 사랑과 자애를 보여 주시어 그를 정성껏 치유해 주심으로써 듣고 말할 수 있도록 하셨다. 우리도 영적 귀와 입이 열려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찬양 노래하자는 말씀을 드렸다.
오늘 제1 독서는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로서 그가 악인들로부터 온갖 모욕과 박해를 당해도 주 하느님을 굳게 믿고 꿋꿋이 견뎌내는 의로움을 보여 준다. 제2 독서는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므로, 믿음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이다. 복음은 당신 수난을 예고하시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일보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가르침이다.
예수님께서는 잠시 벳사이다에서 소경을 치유해 주신 다음, 갈릴래아 지방을 떠나 북쪽의 카이사리아 필리피를 향해 길을 가셨는데, 아직도 피신하시는 중이다. 카이사리아 필리피는 많은 우상을 섬기는 도시였는데,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헤르메스 신의 아들인 판 신(삼림과 농업, 목축을 관장하는 신)을 특히 섬겼기에 판네아스(Paneas)라고 불리기도 했다. 헤로데 대왕이 도시를 건설하여 로마 황제에게 헌정했기에 카이사리아라고 했고, 그의 아들 헤로데 필리피가 기원전 2년경에 이곳에 수도를 세워 카이사리아 필리피라고 불렀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우상 숭배가 심한 도시 근처를 지나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많은 이가 우상을 숭배한다. 우상 숭배란 다름이 아니라 자신을 섬기는 것이다.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고집과 탐욕, 이기심을 이루기 위해 우상을 섬긴다. 사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대부분도 예수님을 떠나갔고 열두 제자만 남았는데(요한 6, 66), 그들 역시 자기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우상으로 섬겼기 때문이다. 사람이 우상 숭배, 자기 탐욕과 이기심, 자기를 버리기란 대단히 어렵다. 하느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순종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예수님께서도 고뇌에 싸여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떨어질 때까지 기도하셨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가 너무 힘드시기에 거두어 주시길 청하셨다. 그러나 곧이어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다(루카 22, 42). 예수님께서도 당신 뜻을 구하셨지만, 이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셨다.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맡기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계셨고, 당신께서 걸어야 할 십자가 길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우상 숭배에 찌든 도시 근처를 지나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사람들의 반응을 먼저 물으셨다.
이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답한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기적들을 보고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는 않았다. 다만 메시아가 오기를 준비하는 예언자, 하느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예언자, 그 가운데에서 특별한 치유 능력이 있는 예언자로 바라보았다. 아직도 이런 믿음을 가진 이들이 유대인이며, 이슬람교도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특출한 랍비, 예언자로 여기고 있다.
사람들의 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뽑으셨고, 당신을 떠나지 않고 따르는 열두 제자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신다. 이에 베드로가 열두 제자를 대표하여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제자들, 그들은 예수님께 올인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열둘을 대표하여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씀드리기도 했다(마르 10, 28). 그들이 아무런 기대와 희망도 없는데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을까? 가족도, 재산도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면, 예수님께 거는 기대가 얼마나 컸을까?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 10, 37)라고 청할 정도로 예수님께 거는 기대는 컸다. 그들은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광의 자리에 앉으리라고 믿었다. 어쩌면 유대를 로마로부터 해방하여 새 왕조를 새우리라는 생각까지 했었는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예수님께 거는 기대가 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만 엄중히 이르신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속마음을 모르셨을까? 충분히 아셨으리라. 그들이 당신께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크고, 당신이 메시아로서 유대를 구할 것을 원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으리라.
그리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으리라. 그들의 들뜬 마음이 가라앉을 충분한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셨으리라.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더욱이 이 말씀을 명백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시지만, 유대뿐만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시는 메시아, 모든 죄와 악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아, 새 하늘과 새 땅, 새 생명을 주시는 메시아로서 죽임을 당하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야 함을 명백히 말씀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도 없었고, 알아듣기도 싫었다. 예수님은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아이셔야만 했다. 죽임을 당하는 메시아이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했다. ‘꼭 붙들다.’라는 표현은 멱살을 잡고 흔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개신교 새 번역 성경에서는 ‘바싹 잡아당기고’라고 번역했다. 그만큼 예수님께 거는 기대도 컸고, 그만큼 제자들의 실망, 나아가 좌절이나 절망이 컸다. 오죽하면 스승님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을까?
그러한 제자들을 보시는 예수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제자들의 마음을 익히 헤아리셨으리라. 그러나 제자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 뒤를 따라와야 하기에, 제자들을 더욱 강하게 가르치셔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사탄이라고 꾸짖으시니 얼마나 호된 꾸지람인가! 그처럼 호되게 꾸짖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베드로와 제자들은 깜짝 놀랐고, 한편 서글프기도 했으리라. 제자 된 도리로서 예수님의 죽음을 막겠다는 충성심의 발로였는데, 그 마음을 몰라주신다는 생각도 들어 억울하기도 했으리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은 사람 대부분의 생각이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대부분 자기만 생각한다. 하느님은 물론 다른 사람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곤 한다. 그런데 그처럼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 사탄이다. 사탄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고,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하고, 하느님을 멀리하도록 한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가 멀어지도록 방해하는 존재가 사탄이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존재에 대해 확실하게 설명해 주셨다. 사탄은 뿔난 시커먼 자가 아니다. 삼지창을 들고 있는 자도 아니다. 예뻐도 미워도, 무엇을 잘해도 못해도 사탄과 관계가 없다. 사탄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는 존재이며, 하느님으로부터 우리를 멀리 떨어트리는 존재이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군중을 부르시고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자기를 버리면 살고, 자기를 살리면 죽는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그토록 고집했던 자기를 버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스스로 자기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죽음을 통해 자기를 버리도록 하셨고, 그렇게 자기를 버림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조금 자기를 고집해도, 욕심과 이기심이 많아도, 언젠가는 죽고, 자기를 버릴 것이므로,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거저 주실 것이므로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다만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바라보며 걸어가면 된다. 십자가를 지고 넘어져도 관계없다. 주님께서도 세 번씩이나 넘어지셨다. 그러니 삼천 번 넘어져도 무방하다. 주님께서 일어나셨듯이, 우리도 일어나 걸어가면 된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라 걸어가면 영원한 생명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에게 열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