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7주일 나해(마르 10, 2-16) 내 갈비뼈
지난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셨다. ‘교회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라고 말씀드렸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사람을 무척 소중히 여기시므로 그에게 해준 것이 예수님께 해드린 것이며, 나아가 하느님께 해드린 것이므로, 자신도 소중히 여기고 다른 이도 소중히 여기라는 말씀, 하느님 나라는 너무나 좋으므로 손, 발, 눈 하나가 없어도 꼭 들어가야 하며, 손, 발, 눈 하나가 없어도 기쁨과 평화가 가득할 정도로 사랑이 가득한 나라라는 말씀을 드렸다.
오늘 제1 독서는 하느님께서 사람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어 협력자로 주시었다는 내용이며, 제2 독서는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시어 많은 자녀를 영광으로 이끄셨다는 말씀이고, 복음은 혼인과 작은 자의 소중함에 대한 말씀이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냐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어떻게 하라고 명령했냐고 되물으셨고, 그들이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했다고 답했다. 그들이 답한 율법은 “어떤 남자가 여자를 맞아들여 혼인하였는데, 그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증서를 써서 손에 쥐어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신명 24, 12)라는 말씀이다.
고대 사회는 남성 위주의 시대로서 힘이 약한 여성을 물품처럼 취급했고, 여성을 아내로 데려올 때는 아내의 아버지에게 일정 비용을 내야 했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여러 부족은 아내를 데려올 때 그 아버지에게 일정 비용을 내고 데려온다. 이렇게 데려온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어떻게 할까? 아내를 데려올 때 낸 비용은 아깝고, 아내를 데리고 살기는 싫고, 그래서 아내를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때 버려진 여성은 혼자 살기 어렵다. 지금도 여성이 직업을 갖기 어려운 이슬람 국가에서는 남편이 사망한 후 살길이 없어서 여성이 남장하여 직업을 갖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러니 그 옛날에 버려진 여성은 도저히 혼자 살 수 없다. 이혼장을 써주는 까닭은 여성이 재혼할 수 있는 법적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혼장을 쓰는 것도 많은 증인 앞에서 선언하는 일종의 의식이므로 이혼장을 써주어 아내를 함부로 버리지 못하도록 하는 규례이기도 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잘 아시기에,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라고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먼저 꾸짖으신다. 완고한 마음이란 돌같이 굳어진 악한 마음이다. 감수성이 없고 사랑이 없는 마음이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사랑 없이 사랑으로 율법을 읽지 않으면 율법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 사랑으로 보고, 읽고 해석해야 한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사랑 없이 살아가면 하느님의 뜻에 따르지 않는 것이다.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 사람이 사랑으로 살지 않으면 사람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자기 탐욕에 따라 왜곡하여 바라본다. 사람도 돈으로 본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마음으로 살라고 그들을 꾸짖으셨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흔히 사람은 세 번 태어난다고 한다.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첫 번째 탄생이고, 두뇌가 급격히 발달하는 사춘기가 두 번째 탄생이며, 혼인이 세 번째 탄생이라고 한다. 혼인은 한 남성과 한 여성이 혼인으로 한 몸이 되는 것이며, 한 인격이 되는 것이다. 어릴 때는 부모의 도움으로 자라나지만, 성인이 되어 이성을 만나 새 가정을 이룸으로써 둘이 한 몸, 한 인격이 된다. 혼인 인격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까닭은 둘이 만나 가정을 이루어 한 몸이 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혼인은 하느님의 섭리이며,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삶이다. 한 몸을 분리할 수 없듯이 부부를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오늘날 너무 쉽게 헤어진다. 헤어지는 원인 가운데 가장 많은 원인으로 성격 차이를 꼽는다. 각각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녀가 성격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서로가 그 차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성격 차이가 있는 배우자를 감싸고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셋째, 예수님께서는 집에 들어가셔서 다시 묻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치신다. 아무리 이혼장을 써 주었다고 할지라도, 남편이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간음죄를 짓는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아내도 마찬가지로 간음죄를 짓는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당시 간음죄는 사형에 처했다(레위 22, 10; 신명 22, 22-24). 배우자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만나 혼인하는 것은 사형을 당할 정도로 중죄라고 가르치셨다. 하느님께서 한 번 맺어주신 것은 죽음으로써만 풀어지지, 살아 있는 동안 절대로 풀어지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그만큼 혼인이 소중하다는 가르침이다. 배우자를 그만큼 소중히 여기라는 가르침이다.
메리지엔카운터는 대단히 소중한 현대적 가치다. 부부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직접 체험하도록 한다. 그리고 ‘사랑은 결심’이라고 익힌다. 매순간 사랑하기로 결심해야 행복한 부부 생활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사람들이 당시 관습에 따라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축복해주시기를 청하자, 제자들은 지치신 예수님을 염려하여 사람들을 꾸짖었다.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언짢아하셨는데,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분개하셨다는 뜻이다. 보잘것없는 어린이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막는 것은 예수님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그토록 어린이를 소중히 여기신다. 예수님께서는 데려온 모든 어린이를 하나씩 끌어안아 주셨고, 안수해 주셨으며, 축복해주셨다. 어린이, 죽을 목숨, 보잘것없는 자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이시다. 보잘것없는 이들이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돌보아주고, 격려해주어야 한다.
나아가 우리 자신이 그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꼴찌가 되고, 종이 되라고 가르치셨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더욱 낮아지고 보잘것없어져야 한다.
완고하고 악한 마음을 버리고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라. 배우자는 소중한 나의 한 부분이며, 내 갈비뼈이므로 배우자를 사랑함으로써 나를 사랑하라. 배우자를 버리는 것은 사형에 처할 정도로 큰 죄이므로 늘 사랑하기로 결심하며 살아가라. 보잘것없는 이를 하느님께 인도하고, 스스로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