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일 다해(요한 2, 1-12) 시키는 대로 하여라.
지난 주일은 주님 세례 축일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은총을 주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심으로써 성령을 비둘기 형태로 강하게 받으셨듯이 우리도 세례를 통하여 성령을 받으며,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주님 명령을 잘 지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자는 말씀을 드렸다.
오늘 제1 독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어 영광과 축복을 주시리라는 예언이며, 제2 독서는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어 공동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가르침이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에 관한 말씀이다.
혼인은 가장 경사스러운 대사로서 고대의 혼인은 가문과 가문, 국가와 국가의 연합을 이루는 중요한 의식이었다. 특히 유대에서 혼인은 종교적 의무이며,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하느님 창조 사업에 동참하는 대사이기에, 7일 동안 잔치를 베풀었다.
‘카나’라는 마을은 나자렛에서 동북쪽으로 약 이십 리 정도 떨어져 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물론 성모님께서도 잔치에 참석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과 가까운 친척의 혼인인 듯하다. 이들은 잔치를 벌이면서 누구보다도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을 초대했다.
오늘 우리가 첫째로 묵상할 점은 우리 삶에 주님을 초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은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은총과 축복을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 삶에 하느님을 초대해야 한다.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을 초대해야 한다. 아무리 크고 성대한 잔치라도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복된 잔치가 될 수 없다. 축복받고 기쁨을 주는 잔치가 되기 위해서는 성모님과 더불어 예수님께서 함께 계셔야 하고, 이를 위해 우리는 주님과 성모님을 함께 초청해야 한다. 우리 가정에 십자가와 성모님 상을 모시는 까닭도 카나의 혼인 잔치처럼 주님과 성모님이 함께하시어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다. 믿음 깊은 신앙인은 언제 어디서나 성모님, 주님과 함께 산다. 그러므로 성모님과 주님을 초대하여 함께 사는 신앙인이 되자.
잔칫집은 많은 하객으로 성시를 이루고, 잔치는 더없이 흥겨웠으리라. 그런데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물이 귀한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포도주는 술의 역할만이 아니라 음료의 역할을 하므로 포도주가 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혼인 잔치에 많은 양의 포도주가 필요하여 혼주는 약혼식 때부터 포도주를 준비하므로,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혼인 잔치, 많은 이가 함께 기쁨을 나누고 축복을 빌어주는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혼주와 신랑은 얼마나 난감했을까!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실까 두렵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당할까 부끄럽고 창피했으리라. 어디 가서 포도주를 구해 오기도 쉽지 않고, 그래서 한숨만 푹푹 쉬고 고개를 떨구고 있는 혼주와 신랑을 상상해 보라! 아마도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리라. 그런데 그러한 난감한 상황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마음 아파하시는 분, 그분이 성모님이시다.
둘째로 묵상할 점은 성모님이 우리 사정을 너무나 잘 아시고 우리를 위해 주님께 전구해 주신다는 점이다.
성모님은 많은 이가 희생당하거나, 내전으로 죽고, 전염병으로 고통을 겪는 등, 어려움과 아픔이 많은 곳에 발현하셨다. 발현하신 성모님은 많은 기적을 통하여 그들의 어려움과 아픔을 해결해주시고 감싸주셨다. 성모님은 상처받고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을 치유하시고 모성애로 감싸주셨다.
성모님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먼저 아신다. 성모님은 우리가 어려움을 해결하도록 주님 앞에 서도록 해주시고, 주님께서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시도록 우리를 위하여 대신 기도하시는 분이시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아신 성모님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라고만 말씀하셨다. 그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 주님께 전구해 주셨다. 그렇게 우리가 처한 상황, 우리의 어려움, 아픔, 괴로움을 말씀드리는 것,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나의 상황과 처지를 겸손하게 말씀드리는 것, 그것이 훌륭한 기도이다. 어려움이 해결되거나 그렇지 않거나는 주님께서 하실 일이다. 다만 나의 상황, 나의 어려움만 말씀드리고, 주님께 맡겨드려야 한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 온전한 의탁이 참된 기도이다.
셋째, 주님께서는 성모님의 전구를 들어주신다.
성모님의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아직 당신의 때가 이르지는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성모님은 예수님께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 집의 어려운 사정만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사실 예수님도 성모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벌써 그 집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계셨지만, 지켜보셨을 따름이리라.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여 하느님의 아들이 기적을 일으켜 물을 포도주로 바꿔주어야 하는가? 살면서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지 않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누구나 시련과 고통을 당해야 하고, 이를 이겨내며 산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런데도 성모님께서 말씀하시니 성모님의 마음을 아시고 어려움을 해결해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의 전구를 청해야 한다. 성모님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 이때 가장 간편하면서도 소중한 기도가 묵주 기도이다. 묵주 기도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라고 성모님의 전구를 구하며 성모님과 함께 드리는 기도이다. 성모님과 함께 나의 어려움과 고통, 나 자신을 주님께 의탁하는 기도이다. 주님께 의탁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곁들여 주신다(마태 6, 32-33).
넷째, 순종이란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하는 유일무이한 비결이다.
성모님은 그 집 사정을 주님께 말씀드린 다음,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소중한 가르침이다. 자기 생각이나 고집대로 하지 말고, 오직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여라.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다.”(1사무 15, 22) 주님 말씀에 순종하라는 성모님의 말씀은 성경의 모든 예언자가 외치는 말씀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물독에 물을 채워라.”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 가정에서 손이나 그릇 등을 씻는 정결례에 사용하는 물독에는 18~36L 정도를 담을 수 있으므로, 물독 여섯 개는 200~300L 정도로 상당히 많은 양이다. 하인들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 물독에 물을 가득 채웠다. 대충 채운 것이 아니라 정성을 기울여 물독마다 물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 물을 퍼서 과방장에게 가져다주라고 말씀하셨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과 물독에 물을 채우는 것은 전혀 관계가 없다.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에 따라야 한다. 그것이 신앙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 같은 말씀을 따르고 행하는 것, 그것이 신앙이다. 그리고 내 생각과 고집을 접고 주님의 뜻에 따라 행했을 때 주님께서는 기적을 일으켜주신다.
신앙이란 이처럼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며, 자기 생각이나 뜻을 고집하지 않고 주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행했을 때 문제를 해결하고, 죽음을 넘어서며, 기적이 일어난다. 그래서 성모님은 무엇이든지 예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도록 하심으로써 우리가 신앙의 길로 걷도록 우리를 이끄시고, 기적이 일어나도록 이끌어주신다.
일꾼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행했더니 그 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변해 있었다. 물이 언제 어떻게 포도주로 변했는지 모르지만,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안 사람은 일꾼들이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놀랍고 기뻤겠는가! 자신들은 겨우 물독에 물을 퍼붓고 퍼부은 물을 퍼서 잔치 맡은 이에게 가져다주었을 따름인데, 그 물이 포도주로 변했으니 얼마나 놀랍고 기뻤겠는가!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행하면 기적이 일어나고, 어려움이 해결되며, 모든 이들을 풍요롭고 기쁘게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온전히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으리라. 그들은 그리스도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신앙인이 되었으리라.
일꾼들이 곧 교회이다. 교회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들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고(1코린 11, 3), 교회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지체들이다(로마 12, 5). 교회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께서 시키시는 대로 성실히, 묵묵히, 행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당신 뜻을 철저히 버리고 하느님의 뜻과 말씀에 자신을 온전히 따르시어 십자가에 매달리셨듯이 교회는 철저히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야 한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되고 기적이 일어난다. 이리하여 혼인 잔치는 더욱더 활기가 넘쳐흘렀고, 모두가 기쁨 속에서 잔치를 계속할 수 있었다.
우리 삶 속에 늘 주님과 성모님을 초대하자. 성모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주님께 전구해 주시길 청하자. 성모님 말씀에 따라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만 행하여, 어려움을 해결하고 기쁨과 활력이 넘치는 삶을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