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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5주일 다해(루카 5, 1-11) 레마(살아 있는 하느님 말씀)

세심정 2025. 2. 8. 11:05

지난 주일은 주님 봉헌 축일이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굳이 예수님을 성전에서 봉헌하지 않으셔도 되는데도, 예수님을 성전에서 봉헌하셨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주님이시므로, 첫째를 바침으로써 하느님이 모든 것의 주님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한다. 일주일의 첫날인 주일, 내 삶의 첫째 시간, 수입 등을 바치되, 먼저 바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를 먼저 바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다.

 

오늘 제1 독서는 이사야가 하느님을 체험하고 예언자로 부르심 받는 대목이며, 2 독서는 구약의 예언대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실제로 사도들과 많은 형제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씀이다. 복음은 주님을 체험한 어부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첫 제자들이 된 대목이다.

 

겐네사렛 호수는 호수가 하프처럼 생겼다고 하여 만들어진 이름으로 갈릴리 바다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호수 주변에서 많이 활동하셨는데, 이날도 호숫가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 말씀을 듣기 위해 군중이 몰려들었다.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는 어부들을 보시고, 시몬의 배에 올라타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시몬을 알고 계셨다(요한 1, 42). 예수님께서는 배를 뭍에서 조금 떨어지도록 하신 다음 군중을 가르치셨다. 군중을 가르치신 후, 시몬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시몬은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한 후 그물을 내렸다.

가능할까? 쉽지 않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로 자라났고, 살았기에, 누구보다도 갈릴리 바다를 잘 알고 있었고, 고기 잡는 방법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당시 어젯밤에 쳤던 그물을 걷었고, 다시 그물을 치기 위해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는 피곤하고 지친 상태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 말씀을 따라 그물을 쳤다. 일반 사람들 같으면 예수님을 비웃고 지나쳤으리라. 왜냐하면 예수님 시대의 그물은 투명하지도 않고 실도 굵기 때문에 물고기도 다 보고 피해 갈 수 있으니, 낮에 그물을 치면 고기가 다 도망간다. 또한 물고기는 먹이 사냥을 위해 낮에는 물가로 나오고 밤에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라는 말씀은 상식에도 어긋나는 말씀이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순종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쳤다.

 

희랍인들은 말씀을 로고스(λογος)레마(ρημα)로 구분한다. 로고스는 하느님의 거룩하고 이성적인 말씀, 성경을 가리키고, 레마는 하느님께서 특정한 순간에 개인에게 주시는 살아있는 말씀을 뜻한다. 즉 심장을 찌르는 말씀이다. 우리를 변화시키고, 위로부터 태어나며, 거듭나게 하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 12)라는 바로 그 말씀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미사를 통해서, 성가를 통해서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 말씀이 기적을 이루고, 병을 낫게 하며, 삶을 변화시킨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창세 12, 1-2)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힘이 되고 그의 속을 꿰찔러 길을 떠났다. 떠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흔다섯의 늙은 나이에 오직 말씀만 붙잡고 평화롭게 안주하던 곳을 떠나 생면부지의 곳으로 갔다. 저도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 27)라는 말씀이 제 심장을 파고들어, 오늘 이 자리에 있다. 바로 그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쌍날칼보다 날카로운 하느님 말씀이 교우님들 속을 꿰찔러 교우님들을 변화시키고, 은총과 축복을 주시기를 바란다.

 

베드로가 예수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리자 물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울 만큼 많이 잡았다.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예수님이 능력으로 물고기를 깊은 데로 모으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깊은 곳에 물고기가 떼로 모이지 않은 한 불가능하다. 그러니 베드로가 놀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불렀다가, ‘주님이라고 호칭을 바꿨다. 스승님이 많이 알고 가르칠 능력이 있는 존경할 만한 분이라면, 주님이란 자신을 종이라고 낮추는, 그래서 상대를 지극히 높이는 호칭이다. 백성이 왕에게,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호칭이 주님이다. 베드로는 하느님이나 하느님과 같은 능력이 있는 신적 존재가 아니라면 그렇게 물고기를 잡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러니 예수님 앞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철저히 낮추며, 온전히 맡기는 자세이다. 서품식이나 종신 허원식 때, 취하는 자세이다.

베드로는 겁이 났다. 주님 앞에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은 주님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 죄 많은 사람이니 떠나주시기를 청했다. ‘하느님적인 것을 체험할 때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며 마음이다. 오늘 제1 독서 이사야 예언자가 느꼈던 마음이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하느님의 천사를 본 이사야는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2 독서의 사도 바오로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어졌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사도 9, 3-4.8) 이 체험, 삶을 온전히 변화시키는 하느님 체험이 필요하다. 우리도 그처럼 주님을 체험해야 한다. 주님께서 내 삶을 온전히 휘두르시도록 깊은 체험이 필요하다.

 

베드로는 예수님 말씀이 심장에 꽂혀 예수님 말씀에 순종했고, 순종의 결과 엄청난 물고기를 잡음으로써 주님 현존을 체험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는 주님 말씀을 어떻게 거역할 수 있겠는가! 그는 여전히 두려웠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온전히 따랐다. 배도, 그물도, 방금 잡은 고기도,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그는 여전히 겁도 많고, 두려움도 많았다. 인간적 약점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수와 잘못, 허물도 크고 많았으며 죄도 지었다. 예수님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수없이 들었다. 그래도 끝까지 주님을 따랐고, 주님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목숨을 바쳤다.

 

심장을 꿰뚫는 말씀과 삶을 바꾸는 체험,

베드로는 이를 통해 일생을 주님과 함께 살았고, 주님을 위해 살았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쁨으로 살았다.

오늘 우리도 그 말씀과 체험으로 주님과 함께 살고, 주님을 위해 살며,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쁨으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