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일 다해(루카 6, 27-38) 원수 사랑
지난 주일 복음은 참 행복과 불행에 대한 말씀이었다. ‘하느님 앞에 서냐? 서지 않느냐?’가 참된 행복과 불행을 결정한다. 주님 앞에 선 가난한 사람, 주님을 바라고 간구하며, 죄를 통회하는 이들, 하느님 말씀을 목말라하고,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역으로 주님을 거스르고 탐욕과 이기심에 빠져 악을 저지르고 남의 것을 빼앗아 욕심을 채우며 비웃는 사람들이 불행하다는 말씀이었다.
오늘 제1 독서는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도 사울이 기름 부음 받은 이라며 해치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제2 독서는 흙으로 만들어진 아담과 비교하여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를 보여주며, 우리가 흙의 모습을 지녔지만,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니리라는 말씀이다. 복음은 지난 주일 복음 다음 대목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은 그리스도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속에는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이 담겨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만 가득하시어, 사랑만 하신다. 사랑밖에 모르신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사랑하신다. 하느님의 사랑에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원수도, 악한도, 죄인도 사랑하신다. 하느님을 닮은 그리스도인 역시 마음속에 사랑만 품고 사랑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감싸주며 원수까지도 용서한다.
1981년 5월 1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터키 출신의 암살범 메흐메트 알리 아가에게 총격을 당해 중상을 입었지만, 감옥을 찾아가 암살범을 용서했다.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동료 수감자를 대신하여 죽음을 선택했고, 자신을 사형에 처한 나치를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하며 용서했다. 마더 테레사는 인도의 빈민과 병자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면서 자신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도 사랑과 친절을 베풀었다. 원망하기보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삶을 실천했다. 그녀의 삶 자체가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더욱이 사람은 하느님 모습을 닮은 존재, 하느님 생명의 숨이 불어 넣어진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이다. 하느님 모습이 사람 안에 담겨 있기에, 사람은 또 하나의 작은 하느님이다. 비록 그가 악하고, 추하고, 비루할지라도 또 하나의 작은 하느님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죄가 크고 많아 모든 사람으로부터 비난받더라도 사람은 소중하다. 원수도 소중하고, 박해하는 사람도 소중하다. 그러므로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할까? ‘원수 사랑’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까?
1) 미워하는 자에게 잘해주어라.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어라.” 자신 안에 미움을 키우지 말고, 사랑을 키워라. 그가 미움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살도록 미움을 사랑으로 감싸주어라. 사랑으로 미움을 녹여라.
2)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학대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여라. 그들은 상처가 크고 곪아 터진 병자이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이 더욱더 필요하다. 그러니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
3)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도록 버려두어라. 여기서 뺨은 턱뼈, 때리는 것은 모욕하는 것을 넘어서 폭력까지 행사하는 것을 뜻한다. 겉옷을 가져가는 것은 빼앗아 가는 것이며, 심지어 속옷까지 빼앗아 가는 강도질이다. 힘세고 악한 자가 폭행하며 강도질해도 대항하다가 목숨을 잃지 말고, 참고 견디라는 가르침이다. 하느님께서 심판하시고 갚아 주실 것이니 하느님께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목숨을 소중히 여기면서 하느님께 맡기라는 말씀이다.
4)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달라고 청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고도 되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내 사람, 내 것, ‘이것만은 안 돼!’라는 세상 것에 대한 애착을 버려라. 하느님께서 갚아 주시니 하느님만 붙잡아라.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라. 청하는 이를 외면하지 말고, 베풀었다고 하여 받으려는 기대를 버리라는 가르침이다.
그 대상이 누구일까? 일반적으로 내 사람, 내 편, 내 이웃이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를 잘 지킨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끼리는 서로 도와주고, 베푼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대상이 이웃만이 아니라 원수까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소중한 사람, 하느님을 닮은 고귀한 존재인 사람 전체이다. 이들에게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라(黃金律)고 가르치신다. 끼리끼리는 누구나 할 수 있고, 하고 있다. 죄인들, 조폭들, 강도들도 자기들끼리는 빌려주고 베풀며 살아가는 규칙이 있다. 그러니 편과 이웃의 범주를 넓혀라. 하느님의 편과 이웃이 그리스도인의 편과 이웃이다.
교회는 지금도 이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1950년대 우리나라가 극도로 가난한 시절에 많은 선교사가 입국하여 우리나라를 도왔다. 50년대에 지어진 성당이 많은 까닭도 그들의 도움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선교사들이 동남아와 아프리카, 남미 등지의 가난한 국가에서 얼마나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가? 황창연 신부님이 잠비아에 농업대학을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지역사회의 건강 증진과 복지 향상, 산림 복원과 생태계 보호 등 지역사회 발전과 주민들 삶의 질 향상에 얼마나 큰 노력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모든 것이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랑이다.
5)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라.” 그러면 심판, 단죄받지 않고 용서받을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정보를 습득, 분석, 판단하여 행동한다. 선악을 정확하게 판단하지 않으면 올바르게 행동할 수 없기에 건전한 판단력은 꼭 필요하다. 그런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정의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내 판단은 정의가 아니라 주관적인 견해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내 판단을 말하는 것, 특히 비판하는 것,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찾아내어 단죄하는 것을 대단히 조심해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한다.”(로마 2, 1)라고 말하며, 남을 심판하는 대로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로마 14, 10) 말한다. 심판은 오직 하느님께 속한 권한이다.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아야 한다. 남 앞에서 하지 말고, 하느님 앞에서만 해야 한다. 남 앞에서 하면 큰 죄가 되고, 하느님 앞에서 하면 기도가 된다.
마지막으로, “주어라.”고 명령하신다. “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듯이”(요한 3, 16) 주라고 명령하신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사도 20, 35). 그러니 주는 사람이 되자. 그러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주실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을 사랑한다. 원수까지도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창조하셨으니,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구체적으로 미워하는 자에게 잘해주고,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학대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는 것이고, 세상 것을 움켜쥐지 말고, 필요한 이에게 나누어주며 남을 비판하거나 단죄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 하느님 사랑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신앙인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