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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일 다해(루카 9, 28ㄴ-36) 삶의 힘을 주시는 주님 체험

세심정 2025. 3. 15. 12:25

지난 주일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시어 40일 동안 단식기도를 하시고,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으시는 대목이었다. 악마는 빵과 재물, 권력과 영예, 자기 과시라는 인간 본연의 욕망으로 유혹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유혹을 하느님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그러나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고 떨어져 서 있었다. 우리도 인생이라는 광야에서 예수님처럼 기도하고 하느님 말씀으로 악마를 물리쳐야 한다. 유혹은 늘 우리 곁에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도 늘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인생이란 광야에서 주님 말씀으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자는 말씀을 드렸다.

 

오늘 제1 독서는 하느님께서 아브람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하시고, 그와 계약을 맺으시어 땅과 후손을 약속하시는 대목이며, 2 독서는 하늘의 시민인 그리스도인은 현세의 이익에 빠지지 말고 구세주를 기다리며 굳건히 살자는 말씀이다.

 

사순 제2 주일에 교회가 읽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산에 오르시어 기도 중에 천국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대목이다. 오늘 복음 전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에게 수난과 죽음, 십자가는 듣기 거북하고, 듣고 싶지 않아 피하고 싶은 말씀이다. 영광, 은총, 축복 등의 말씀을 듣기 원하지, 누가 그런 말씀을 듣고 싶어 하겠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수난과 죽음, 십자가를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이고, 그러면 하느님 나라의 영광이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보증하시기 위해 이어서 이곳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8일쯤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대표하는 세 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사람의 모습이 아닌 천국의 거룩한 모습으로 달라졌고, 옷도 천상의 옷처럼 하얗게 빛났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천국을 체험할 수 있을까? 기도를 통해 체험한다. 교회 역사를 보면 수많은 성인이 기도하는 중에 천국을 체험하곤 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1515-1582),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1226),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최근에 사망하신 분으로 오상의 비오 신부님(1887-1968)이 있다.

비오 신부님은 기도 중 가끔 탈혼 상태에 빠지셨고, 예수님, 성모님, 천사들과의 대화를 나누셨으며, 미사를 집전할 때 탈혼 상태에 빠져 몇 시간 동안 미사가 지속되기도 했다. 기도 중에 다른 사람이 깨울 때까지 완전히 신비적인 세계에 몰입한 경우도 많았으며, 탈혼 중에는 주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몸이 공중에 뜨는 현상, 얼굴이 빛나고, 고통 속에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는 신비로운 체험을 했고, 오상을 받았으며, 성흔에서 나온 피에서 장미 향기가 났다는 증언도 있다. 탈혼 상태에서 미래에 대한 계시나 영혼의 상태를 직관적으로 아는 능력도 있었고, 고해성사 중 마귀도 보았으며, 고해자의 마음을 읽고, 숨은 죄를 지적하기도 했다. 신부님의 유해는 이탈리아 남부의 산 조반니 로톤도에 있는 성 비오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고, 지금도 많은 이가 이곳을 순례하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천국을 직접 볼 수 없다. 직접 보면 죽는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1코린 13, 12)라고 말했다. 우리가 천국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수많은 성인이 오늘 복음의 세 제자처럼 기도를 통해 천국 영광을 체험했다. 그러한 성인들을 통해 우리는 천국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성인들처럼 그런 신비 체험을 하지 못하는가? 성인들은 신비 체험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보통 사람은 그런 신비 체험으로 인해 자칫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살라고 창조하셨지, 죽으라고 창조하지 않으셨다. 그러니 하느님 체험을 통해 죽으면 되겠는가! 그래서 제 체험을 말씀드리겠다.

신학생 때는 신부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신부가 되면 하느님 은총으로 변화되리라는 희망으로 살았지만, 신부가 되었는데도 신학생 때와 같았다. 내적으로 변한 것이 없었다. 사제란 그리스도를 전하고 보여주어야 하는데, 제 안에 보여줄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느님께 찐한 체험, 나를 온전히 변화시킬 진한 체험을 청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진한 체험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언젠가 피정 중에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을 방문하는 대목을 묵상하는데,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고, 그렇게 묵상하다가는 내가 죽을 것만 같아 묵상을 중단했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낫지 않은가! 그때 깨달았다, 나는 새가슴이라서 진한 체험을 하면 죽을 것이라서 하느님께서 진한 체험을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그리고 그 후부터 진한 체험을 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그마한 체험을 소중히 여기고, 그 체험을 소중히 모아 큰 체험으로 만들면 된다. 큰 체험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작은 체험을 소중히 모을 줄 알아야 한다.

 

베드로와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모세와 엘리야도 보았다. 그들도 천국 영광체험이 너무나도 버거워서 잠에 빠졌다. 아마 잠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잠에 빠졌다가 깨어났기에 살아남았으리라. 그런데 그 영광의 체험이 얼마나 크고 좋았으면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겠는가!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 정도로 그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체험이 너무나도 크고 좋았기에 그렇게 말했고, 이후 주님을 충실히 따랐고, 주님의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며 목숨을 바쳤다.

 

인생이란 사순절을 잘 살기 위해서는 오늘 제자들처럼 천국 영광을 체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평범한 사람이기에 사도들처럼 체험할 수 없다. 그래서 성경 속에서, 성가를 부르거나 기도하는 중에, 자연 속을 거닐거나 편안히 앉아 멍때릴 때, 문득, 가끔 주어지는 조그마한 체험을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여겨 간직해야 한다. 그 조그마한 체험을 보자기에 싸서 큰 체험이 되도록 하자. 우리 삶은 이 세상으로 끝나지 않고, 이 세상의 시민만이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서 새로운 세상으로 건너가야만 하는 하느님 나라의 소중한 시민이다. 새로운 세상,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기 위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조그마한 체험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고 간직하자. 그래서 천국에서 또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