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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2주 다해(루카 20, 27-38)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

세심정 2022. 11. 5. 09:27

지난 주일 복음은 예리코의 세관장 자캐오에 대한 일화였다. 자캐오는 세관장이란 직위도 있는 부자였지만, 직위나 돈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공허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그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허무에서 벗어나고, 완전함에 이를 수 있었다. 예수님을 만나려는 열정과 간절함을 가지고 나무 위로 올라간 자캐오에게 예수님께서는 내려오라고 말씀하시며, 그의 집에 머무르심으로써 그를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하셨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어 함께하시면 생의 충만함을 느끼며 복된 삶을 살 수 있다.

 

오늘 복음은 부활에 관한 논쟁이다.

예수님 시대에 사두가이는 죽은 다음의 세계가 없다고 믿고 있었다. 사두가이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사제 차독에게서 비롯된 이름이다(2사무 8, 17). 이들은 하스모니안 시대 때(B.C.166~163) 구체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들은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예언서와 같은 성경은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유대 사회 안에서 소수였지만 부유한 지배 계층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로서 주로 사제들의 무리였다. 이들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전 의식을 잘 준수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전과 제사 의식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 이들은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에서 상당수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로마의 통치에 협력하여 자신들의 이권을 유지했다. 또한 천사와 악마, 영의 존재도 부인하며 하느님의 섭리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기원후 70,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함께 몰락했다.

 

사두가이 몇 사람이 부활이 없다는 증거를 대기 위해 수혼 제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했다. 신명기(25, 5-10)에 기록된 수혼 제도란 형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아 아들을 낳아 형의 대를 잇게 해주는 제도이다. 이는 본래 유목민의 전통으로서 과부가 되었어도 며느리로 계속 집안에 붙들어 둠으로써 인력의 손실을 막으려는 방편이었다. 또한 가부장 사회인 고대에 여자에게는 재산의 소유권과 상속권이 없으므로 아들 없이 과부가 된 며느리는 살길이 없다. 살길을 열어주기 위해 아들을 낳도록 해야 하는데, 다른 혈통의 남자에게서 씨를 받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래 시동생과 한시적으로 혼인하여 아들을 낳아주는 것이 곧 수혼 제도이다.

 

이들은 이 제도를 예로 들어, 맞이가 아내를 맞이했는데, 아이 없이 죽어서 동생 여섯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모두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예수님께 질문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이 세상에서처럼 삶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그렇게 질문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현세의 삶과 부활 후의 삶이 전혀 다른 차원이라고 가르치신다.

먼저 이 세상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지만, 부활 후에는 시집가거나 장가가는 일이 없다고 가르치신다. 혼인의 목적은 부부애와 자녀 출산이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도우며, 협력함으로써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혼인한다. 또한 자신이 더 살지 못하므로 자신과 닮은 자녀를 낳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대신 살아가도록 자녀를 출산한다. 그것이 세상 이치이다. 그러나 부활은 완성이며, 영원한 삶이다. 부활함으로써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영원히 살고, 완전하게 되며,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 그러므로 더는 혼인할 이유가 없다.

 

둘째, 부활한 후에는 천사들과 같아져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사도 바오로는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 42-44)라고 말했다. 지상에서의 물질적인 몸은 흙에서 나온 것이다. 흙에서 나온 것은 썩어 없어질 것으로 땅에 묻힌다. 그러나 썩어 없어질 물질적인 몸과 달리 영적인 몸도 있다. 하늘에서 오신 둘째 인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1코린 15, 44-49 참조). 부활 후,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나므로 죽는 일이 없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필리 3, 21)라고 말했다.

 

셋째,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다.”라고 가르치셨다. 이 말씀은 사람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는 관계라는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살아 있는 사람의 하느님이시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 안에 있으면 죽어도 다시 산다. 부활은 육체적인 죽음에서 벗어나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는 새로운 삶이다.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 3, 6)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신앙의 선조들이 몸은 비록 죽었으나 하느님의 능력으로 부활의 새 생명에 참여함을 뜻한다. 하느님께서 그들과 맺으신 계약은 영원한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지상에서 육신의 죽음이 끝인 것처럼 보이지만, 믿음 안에서 죽음은 새로운 삶인 부활의 시작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 25-26)라고 말씀하셨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시작하며, 죽음 이후에 부활하여 완전한 영생을 누린다.

 

11월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성월이다. 교회력으로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달이다. 이 위령성월에 죽음을 기억하고 묵상함으로써 현세를 소중하게 여기며 복된 삶을 살자. 죽음은 모든 것을 앗아가는 허무가 아니라 완성이며 영원한 삶이다.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며,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의 비천한 몸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몸으로 변화되어 영원히 살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을 굳게 믿고, 믿음 안에서 충실히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