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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주일 나해(마르 1, 14-20) 나를 부르시는 주님

세심정 2024. 1. 20. 11:20

지난 주일 복음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준비하는 자세를 보여준 세례자 요한에 관한 대목이었다. 그래서 1) 눈여겨보고, 2) 구세주가 내 죄를 대신하신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며, 3) 아는 것을 실천하고, 4) 주님과 함께 머무르는 행복을 누리고, 5) 그 기쁨과 행복을 이웃에게 전하여 교회의 반석이 되도록 하자는 말씀을 드렸다.

 

오늘 독서는 요나가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인 니네베에서 회개를 선포하자, 그 나라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고 회개함으로써 하느님께서 내리시려고 했던 재앙을 내리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아시리아 제국은 북 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갔을 뿐만 아니라 남 왕국 유대도 괴롭히던 나라이다. 요나는 그 나라가 멸망하기를 바랐는데, 하느님께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명하시니, 그 말씀을 따르고 싶었겠는가! 요나는 할 수 없이 하느님 말씀에 따라 회개를 선포하기는 했지만, 그 나라 백성이 회개하여 하느님을 믿고 죽음에서 벗어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회개는 재앙과 죽음까지 이겨내도록 한다. 그러므로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

2 독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 삶에 연연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세상 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세상 중심적인 삶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첫 번째 제자를 부르시는 대목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하느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며 사랑하신다. 모든 이가 구원받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장 먼저 복음을 전파할 장소로 갈릴래아 지방을 선택하셨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이 나리라 갈릴래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신 까닭은 무엇인가? 갈릴래아 지방은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마태 4, 15)라고 불릴 정도로 이방인들도 많이 살았고, 우상 숭배도 심했으며, 헬레니즘 문화에 젖어 있었던 지방이다. 그 백성은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이며,” 그 지방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이다(마태 4, 16). 그래서 어둠을 물리칠 그리스도라는 빛과 죽음의 그림자를 벗겨내고 새 생명을 주실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곳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빛을 비추시어 어둠을 물리치고, 새 생명을 주시어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가장 먼저 갈릴래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셨다. 상처와 아픔, 비난과 멸시, 온갖 조롱과 수모를 당하는 지방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복음을 전하셨다.

 

오늘 우리가 첫 번째로 묵상해야 할 점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점이다. 하느님은 모든 이를 사랑하신다. 열심하고 경건한 이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아파 신음하는 사람, 조롱받고 수모를 당하는 사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더욱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비난과 멸시를 당하고 상처로 아파하며 온갖 수모를 당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받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주님께 대한 믿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죽어갔는가! 그들은 하느님을 더욱 사랑했기에 더욱 큰 박해를 받았고, 멸시당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 11-12)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아픔과 상처가 많고 비난과 멸시를 당한다면, 그만큼 주님 사랑을 많이 받을 것이다. 그러니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말자. 하느님께서 다 갚아주심을 믿고 하느님께 맡기자.

 

두 번째로 묵상해야 할 점은 회개하라.”라는 말씀이다.

회개란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 중심으로, 내 욕망과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 살았다면, 회개란 하느님을 향하여 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자신을 세우기 위해서 살았다. 나름대로 기획하고 설계하면서, 내가 어느 때에는 이런 사람이 되고, 이런 일을 이루리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살아갈수록, 늙어갈수록 내가 세웠던 모든 것, 그리고 나 자신이 서서히 무너짐을 느낀다. 나는 나를 세우기 위해 살아왔지만, 결국 나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죽음은 나를 사라지고 없어지게 한다. 우리는 죽어야 하는 존재이며, 자기를 버려야 하는 존재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라.”는 주님 말씀이 죽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래서 나 중심적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 중심적으로 살아야 한다. 나 때문에 비롯되는 시기나 질투, 증오나 분노 등의 악감정을 버리고, 하느님의 평화와 사랑, 온유와 자비, 인내와 절제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 때, 나는 참된 평화, 기쁨,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세 번째,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복음을 믿는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믿고, 내가 과거에 죄를 많이 지었고, 지금도 죄를 지으며, 앞으로 죄를 지을지라도, 구세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내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대신하셨음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은총으로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감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어 자녀로 삼으시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니 얼마나 기쁘고 복된가!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특징은 기쁨, 사랑, 평화이다. , 예수님께서는 기쁨, 사랑,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셨고, 우리는 기쁨, 사랑, 평화로 살면서 이웃도 그렇게 살도록 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하여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라고 부르시니,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이 네 제자는 어부였다. 옛날에는 지금과 달리 직업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어촌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고 자라면 당연히 어부가 되었다. 배와 그물은 어부에게 꼭 필요한 생업의 도구이다. 그런데 그들은 부르심을 받자마자 그 도구를 다 버리고, 심지어 아버지와 삯꾼들까지 배에 남겨둔 체,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그들은 생업을 포기하고, 아버지마저 멀리한 체,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그들은 주님께 투신했다.

어떻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었을까?

나를 따라오라는 주님의 한 말씀이 그들을 온통 사로잡았을까? 주님 말씀은 힘이요 능력이기 때문에 절대로 거부할 수 없었을까? 주님의 한 말씀이 전율을 일으킬 정도로 그들을 사로잡고, 이 길만이 참된 삶의 길이며, 자기들이 걸어야 할 길이라는 굳은 확신이 생겼을까?

여하튼 그들은 주님의 한 말씀에 지금까지 걸어왔던 어부의 길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사도가 되었다. 오늘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처럼 우리 주변에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많이 있다. 예수회의 송봉모 신부님은 태중 교우이며, 군 생활까지 주일 미사에 빠진 적이 한 번밖에 없을 정도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제대 말년에 처음으로 성경을 접했다고 한다. 할 일이 전혀 없어서 내무반에 있는 성경을 집어 들고 처음 읽었는데, 그 말씀이 자신을 사로잡아 사제가 되었다. 송 신부님은 오늘 우리나라에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성경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내가 힘들고 고통스럽다면, 이 고통을 통해 주님께서 나를 찾아오심을 믿자. 우리는 마침내 이 세상을 마치고 자신을 버릴 수밖에 없다. 나를 버리고 하느님 중심적으로 살자. 주님께서 내 모든 죄를 대신하셨음을 믿고 구원받은 자로서 복되게 살자. 주님께서 나를 부르셨음을 믿고 주님께 투신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