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 나해(마르 1, 12-15) 인생의 광야를 소중히 살아가자
지난 주일 복음은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는 대목이었다. 우리도 나환자처럼 주님을 알고, 믿고,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께 맡기자. 원하고 구할 때, 더없이 간절히 원하고 구하자.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어 내는 사랑이 하느님 사랑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심을 굳게 믿자.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로운 말씀, 하느님 말씀으로 무장하고 살아가자는 말씀을 드렸다.
오늘 제1 독서는 하느님께서 홍수가 끝난 후 방주에서 나와 하느님께 제사를 드신 노아와 계약을 맺으시는 대목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물로 멸하지 않으시라고 말씀하시고 무지개를 계약의 표로 주셨다. 제2 독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겪으시고, 하느님 오른편에 계시어 만물을 다스리신다. 홍수에서 노아가 구원되었듯이, 우리는 세례를 통해 구원된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시는 대목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통하여 성령을 충만히 받으시고,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드님이심이 선포된 다음, 예수님께서 광야로 가셨는데, 마르코는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고 기록했다. 광야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며, 악마가 사는 곳이다.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하느님을 깊이 체험한 장소도 광야이다. 성령께서는 그러한 광야로 예수님을 내보내셨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왜 광야로 보내셨을까? 광야에서의 기도가 예수님께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광야에서 40일 동안 기도를 통해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공생활을 위한 온전한 준비를 하셔야 했기에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으리라. 예수님께서 당신 소명과 사명을 충실히 행하실 준비를 위해 꼭 필요한 곳이 광야였으리라.
예수님께 광야가 꼭 필요한 장소였다면, 우리에게도 광야가 꼭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에게 광야란 어디일까? 우리에게 광야란 곧 인생이다. 우리는 아무도 세상에 태어나려고 하지 않았고, 태어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태어났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예레 1, 15)라는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나를 뽑아 세우시어 인생이라는 광야로 나를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처럼(마태 1, 18), 우리도 각각 성령으로 잉태되어 인생이라는 광야에 나왔다. 인생이란 광야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거저 주셨으며, 나에게 꼭 필요하고, 대단히 소중하다. 그러므로 인생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 때로는 아프고, 실패하며, 지쳐 포기하고 싶을지라도 인생은 대단히 소중하고 귀하다. 나에게 주어진 인생은 단 한 번뿐이며, 다시 올 수도 없다. 그러니 내 인생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살아야 하겠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지내셨다. 40이란 숫자는 중대한 일을 앞두고 이를 준비하는 기간으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정화의 기간이다. 노아의 홍수 때, 하느님께서 물로 심판하시며 정화하시는 기간이 40일이고,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위해 머무른 기간도 40일이며,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의 기간 역시 40년이다. 그 외에도 엘리야 예언자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호렙산으로 걸어가는데 40일이 걸렸고(1열왕 19, 8), 요나 예언자가 니네베에 회개를 선포한 기간도 40일이다(요나 3, 4). 사십이란 숫자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며 정화하기 위한 온전한 시간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상 희생 제사를 봉헌하시기 위해 40일 동안 준비하셨다. 복음 선포를 위해 충분히 준비하신 것이다.
40일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인생이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고 정화하는 온전한 기간이 곧 인생이다. 생을 마치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나간다. 하느님 앞에 서서, 하느님께서 주신 삶을 이렇게 살았다고 보고드리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이렇게 살아왔다고 말씀드린다. 인생이란 40일을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서 하느님을 기쁘게 뵈올 수도 있고,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40일을 복되게 보내자. 사랑하며 살자. 참고 견디며 살자. 조금 손해 보며 살자.
셋째,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받으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실 때까지도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 27, 40)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27, 42)라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그러나 이 비웃음 속에는 사탄의 유혹이 담겨 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마태 4, 6)라고 유혹했던 사탄이 사람들을 통해서 다시 한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유혹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치셨다. 첫 인류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사람은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는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유혹받는다. 유혹 없는 삶은 없다. 유혹은 삶의 일부이다. 즉, 유혹자 사탄은 언제나 사람과 함께 있고, 틈나는 대로 사람을 유혹하여 죄에 빠트리려고 한다. 그러나 그 유혹을 이겨내고 물리쳐야 한다.
흔히 하느님께서 왜 사탄을 만드셨냐고 질문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사탄을 만들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만드셨고, 천사에게도 자유의지를 주시어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사명을 주셨다. 그런데 천사가 자기 욕심에 빠져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를 지음으로써 사탄이 되었다. 그렇게 죄에 빠져 하느님을 거스른 사탄은 다른 천사는 물론 사람도 죄짓게 유혹한다. 어떤 이가 죄를 지으면 친한 이웃을 함께 죄짓게 하듯이 사탄도 그렇게 죄짓게 유혹한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사탄의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언젠가도 말씀드렸듯이 사탄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단호하게 꾸짖고 물리쳐야 할 대상이다. 우리가 유혹일 이기고 물리칠 때, 우리는 하느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며, 그리스도를 더욱 닮게 된다. 시험을 치르면서 한 단계 올라가듯이, 유혹을 이겨내며 한 단계 올라간다. 그러므로 유혹을 이겨내고 물리치자.
사탄은 예수님을 어떻게 유혹했는가? 마태오나 루카의 복음에 따르면, 사탄은 돈, 자기 높임, 권력 등의 욕구로 예수님을 유혹했다. 이 욕구는 모두가 겪는 유혹이다. 이로 인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저질러진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유혹을 오직 하느님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예수님 안에는 하느님 말씀이 온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마음속에 말씀을 가득히 담으시고, 말씀에 인도되어 말씀으로 사시게 되었다. 사탄의 유혹이란 말씀을 거스르도록 하는 유혹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충만하면 사탄의 유혹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살자. 말씀 충만하여 살자.
넷째,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께 천사들이 시중들었다.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무척이나 굶주리신 예수님께 천사들은 먹을 음식을 제공했다. 이 음식은 일차적으로 육체적 음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영적 음식이기도 하다. 육체적으로 굶주린 예수님께 먹을 음식도 드렸지만, 하느님께서 영적으로 충만하게 하셨으리라.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 음식이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 11)라는 말씀처럼 물과 양식보다 하느님 말씀이 더 소중하다. 40일 동안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말씀으로 채워 주셨으리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영적 음식을 통해 복음을 전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며, 병자를 고쳐주실 수 있게 되셨으리라. 영적 음식을 통해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성자의 본모습이 드러나셨으리라. 그리하여 이제부터 복음과 진리를 선포하시며, 마귀를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쳐주셨으며, 하느님 사랑을 전하셨다.
마지막으로 광야에서 40일 동안 악마로부터 받은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복음을 전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다스리심이다. 지금 내 마음을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면, 주님께 기도하면서 주님 안에 머물면 나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 21)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부터 하느님과 함께 머물면서 하느님 나라에 있다. 하느님 나라에 있는 것이 곧 구원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다. 다만 지상에서 우리는 믿음이 약하여 유혹을 받고 흔들리기 때문에 구원이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이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고, 구원이 시작되었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구원받은 존재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복음을 전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는 구원의 완성을 이루진 못했지만 이미 구원받았고, 하느님 나라에 완전히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이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있음을 선포해야 한다.
오늘 사순 제1 주일을 보내면서 인생이란 광야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잘 지내자.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듯이, 우리도 인생이란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자. 천사가 주님의 시중을 들었듯이 우리도 천사들로부터 육체적, 영적 양식을 풍부히 받자. 하느님 말씀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이웃에게 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