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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함께
연중 제31주일 나해(마르 12,28ㄱㄷ-34) 사랑으로 본문
지난 주일 복음은 예리코의 소경 바르티매오가 다시 눈을 뜨는 대목이었다. 더러운 거지 소경이 주님을 간절히 열망하는 믿음으로 주님을 만나고 주변 사람들의 꾸지람에도 불구하고 더 큰 소리로 주님께 간청하여 눈을 뜨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주님을 따랐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제1 독서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온 마음, 목숨,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그럼으로써 축복을 받으라는 말씀이며, 제2 독서는 영원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바치는 단 한 번의 제사로서 인류를 구원하셨다는 말씀이다.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가르치신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 말씀에 감명을 받고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율법 학자란 하느님 말씀인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며 가르치고 보전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최소한 15년 이상 스승으로부터 율법을 배우고 익혀 시험을 거친 다음, 40세가 넘어야 율법 학자가 되었다. 사제는 25세부터 봉사하여 30세에 임명되었지만, 그보다 10년을 더 배워야 율법 학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겠는가! 그러니 다른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율법 조문 613개(365개의 금령과 248개의 명령)를 하나로 요약한 계명을 찾아, 그 계명만 지키면 모든 율법을 지키길 원했다. 이러한 질문은 율법을 연구하는 이들이 많이 던졌던 질문이다. 이에 대해 어떤 랍비는 “너에게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것이 율법 전체의 요약이며, 그 외는 이를 주석한 것에 불과하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대답에 만족하지 못했기에, 율법 학자는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서슴지 않고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라고 가르치셨다. 이 말씀은 신명기(6, 4-5)의 말씀으로 ‘셰마 기도’라고 하여 모든 유대인이 하루에 세 번, 적어도 아침저녁 두 번은 꼭 드리는 기도이다. 그들은 테필린이라 하여 이마와 왼팔에 이 말씀을 넣은 성구 갑을 두르고 기도하고, 메주자라 하여 오른쪽 문설주에 이 말씀을 넣은 성구 갑을 붙여 놓고, 집을 나설 때나 돌아올 때도 늘 드리는 기도문이다.
먼저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은 유일하신 분이시다. 그러니 다른 신은 없다. 우상은 없다는 말씀이다. 당시 많은 이방인이 섬겼던 여러 가지 신들, 해, 달, 바다, 특별한 동물이나 식물 등은 신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하느님만을 섬기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함이다. 죽을 때까지 놓지 않고 꼭 쥐고 있는 것이 자신이다. 내 뜻, 내 생각, 내 욕망을 이루기 위해 우상을 만들고 주문을 외운다. 바로 그 ‘나’를 버려야 한다. 그래야 한 분이신 주님을 섬길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 34)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을 버려야 하는데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연습, 연습이 중요하다. 버리는 연습, 재물을 버리고, 생각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둘째,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다. 마음이란 존재와 인격의 중심으로 믿음이 자리하는 곳으로서, 목숨, 정신, 힘이 발생하는 근원으로 여겨진다. 그 마음속 모든 것으로 하느님을 생각하고 바라며 순종하라는 가르침이다. 목숨을 다하는 것은 내 몸과 생명 전체를 드리는 것이고, 정신이란 인간 지성의 중심으로 기질과 마음가짐의 중심으로, 뜻을 다하는 것이란 모든 지적 능력과 통찰력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다. 힘을 다하는 것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영적, 육체적 활동력 모두를 포함한 전인적인 능력을 바치는 것이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므로, 온 마음, 목숨, 정, 힘을 다해 자발적으로 사랑하고 헌신하여 순종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하라는 낱말은 아가페,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내주시는 희생적 사랑, 모든 것을 바친 희생의 사랑을 뜻한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희생하여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이 사랑이 가능할까?
요한복음 21장 15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실 때, 아가페를 두 번 사용하셨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두 번 모두 아가페가 아닌 필리아란 낱말로 답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는 ‘필리아’로 사용하셨고, 베드로는 ‘필리아’로 답했다. 예수님 시대에 사용하던 사랑이란 히브리어는 ‘아하바’로서 신적, 친구 사이나 부모와 자식, 남녀 간의 사랑 모두를 표현하는 낱말이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아가페’와 ‘필리아’로 구분하여 복음서를 썼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사랑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는 아가페, 필레오, 스테레고, 에로스인데, 일반적으로 아가페는 신적인 사랑, 필레오와 스테레고는 친구 사이나 부모 자식 사이, 에로스는 청춘남녀의 순수한 사랑을 뜻하지만, 실제로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요한복음에서 굳이 아가페와 필리아로 구분하여 사용한 까닭이 무엇인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외아들을 내주실 정도로 아가페 사랑을 하시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희생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리라. 예수님께서 으뜸 사도 베드로에게 아가페 사랑을 하느냐고 계속 물어보았지만, 베드로는 끝까지 아가페 사랑을 하지는 못하고, 필리아 사랑을 한다고 대답했다.
복음사가는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답한 것이 아닐까?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하느님을 아가페할 수는 없지만, 필리아하면 된다.
셋째, 율법 학자는 첫째가는 계명만 물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첫째 계명에 이어 곧장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둘째 계명을 덧붙이시며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마태오복음에서는 “둘째도 이와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즉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이라는 가르침이다. 여기서도 아가페란 낱말을 사용했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할 때도 희생하며 헌신하는 사랑을 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 이웃이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카 10, 29-37)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너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1요한 4, 20. 21)라고 요한은 말한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들은 율법 학자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말씀드린다. 제사란 하느님과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여 다시 맺는 기도 중의 기도이다. 그런데 제사보다 사랑이 낫다고 말한다. 사랑으로 사는 것, 그것이 곧 제사이며, 사랑으로 살면 제사를 봉헌할 필요조차 없다는 가르침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창조하셨고, 사랑하라고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