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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2주일 나해(평신도 주일 : 마르 12, 38-44) 과부와 율법 학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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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2주일 나해(평신도 주일 : 마르 12, 38-44) 과부와 율법 학자

세심정 2024. 11. 9. 14:30

지난 주일 복음은 율법 가운데 첫째 계명이 무엇인가라는 율법 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하는 대목이었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고, 다른 것들은 모두 우상인데, 우상숭배란 곧 자기 자신을 섬기는 것이라는 말씀, 하느님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아가페적 사랑을 하고, 이웃을 사랑하되, 자신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라는 말씀 등을 묵상했다.

 

오늘 제1 독서는 사렙타의 가난한 과부가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먼저 빵 한 조각을 바치자, 그 집 단지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2 독서는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쳤다는 말씀이며, 복음은 당시 존경받는 율법 학자와 가난한 과부에 대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헌금에 대해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신다. 율법 학자들이란 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하며 가르치고 전수하며, 신앙생활과 법의 집행 및 판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이들이다. 그러니 대부분이 문맹이던 고대에 그들이 얼마나 존경받았겠는가!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국민은 집안에 율법 학자의 사진을 걸어놓는다고 한다. 그 정도로 존경받는 이가 율법 학자들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라고 가르치신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닌다고 말씀하신다. 긴 옷이란 땅에 끌릴 정도로 긴 옷을 가리키는데, 이는 고귀한 신분의 상징이며 긴 옷을 입으면 활동하기 어려워 조심조심 걸을 수밖에 없다. 이런 긴 옷을 입고 집 안에 있으면 무방하다.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어서 나다니는 것이 문제이다. 자기를 더 많이 드러내기 위하여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터로 나간다. 장터에 나가니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존경하여 인사하겠는가! 모름지기 인사란 먼저 본 사람이 인사해야 하는데, 인사받기를 좋아하니, 거드름을 피우며 누가 인사하며, 인사하지 않는가를 따진다. 회당에 가면 자신이 율법을 가장 잘 알고 있으니 가장 높은 자리를 찾아 앉고, 잔치에 초대받아서 가도 첫 자리, 상석에 앉으려고 한다. 남이 자신을 알아주고 높여 주기를 기대한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마음이 있다. 나를 알리고 싶고, 내세우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마음,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마음이 문제라고 말씀하신다. 율법 학자는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이므로, 율법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보여주고 하느님을 높여야 하는데, 자신이 하느님 자리에 앉아서 자신을 내보이고 높인다. 그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하느님을 보여주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하느님의 도구일 뿐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높여져야 하고, 우리는 낮아져야 한다. 세례자 요한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 28.30)라고 말했듯이,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커지시도록 작아지고 작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겸손하고 겸손해야 함을 생각하자.

 

둘째, 율법 학자들의 더 큰 문제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고,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를 길게 하는 점이다. 율법 학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학비를 받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기에 각자 직업을 가지고 생활했다. 그러나 율법을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기에도 벅찬데, 직업을 가지고 생활비를 버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들은 자선에 의존하거나,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대필하고 재판에 관여하면서 생활비를 벌곤 했다. 그러는 가운데 힘없고 도울 사람 없는 약한 과부들의 재산을 뺏는 경우도 많았다. 남을 돕는다고 하면서 해를 끼쳤다. 더욱이 돌볼 사람 없는 약한 과부들에게 해를 끼쳤기에 더욱 악하다. 더더욱 악한 것은 그러면서도 기도를 길게 하여, 남들이 하느님과 아주 가까운 사람으로 보이도록 한다는 점이다. 보이는 기도를 오랫동안 길게 하면서 자기의 악함을 감추었기에 더더욱 악하다. 이처럼 위선을 행했기에 이들은 엄중히 단죄받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확실히 말씀하신다.

사실 위선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누구나 위선 속에서 살아간다. 속을 뒤집어 꺼내 보이면 우리 속은 온갖 더러움과 부끄러움이 가득하리라. 이를 감추기 위해 그럴듯하게 포장하며 살고 있고,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서로 꼴을 봐주며 산다. 그렇지 않고 내 모든 것이 속속들이 다 드러난다면 어떻게 바라볼 수 있으랴?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들을 엄하게 단죄하시는 까닭은 그들이 누구보다도 하느님과 가까워야 하는 율법 학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가르치며 하느님을 온전히 닮아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꾸짖으신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 거지, 병자, 마귀 들린 사람, 이방인 등을 단죄하신 적이 없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더욱더 낮아지고 겸손하며 의를 실천하라는 가르침이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헌금하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사람이 헌금하는데, 부자들은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었다. 예루살렘 성전 주위에는 가난한 과부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오직 하느님을 바라면서 성전 가까이에서 살기 위해 왔고, 성전 가까이에서 지내면서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대부분 집도 없이 살면서 성전을 순례하는 이들의 자선으로 살곤 했다. 그런데 두 닢을 넣었는데, 아마도 그 돈은 순례자들이 베푼 자선이리라. 렙톤은 그리스 화폐로 1/144드라크마에 해당하는 적은 돈이다. 우리나라 화폐로 계산한다면 1,000원 정도의 금액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녀가 가장 많은 헌금을 했다고 말씀하신다.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가난한 사람이 가진 것 모두를 넣기는 어렵지 않다. 가진 것 모두 합해도 얼마 되지 않으며, 있으나 마나 별 차이가 없다. 가난한 사람은 있어도 가난하고, 없어도 가난하다. 그러나 부자가 가진 것 모두를 넣기는 어렵다. 가진 것 모두를 넣으면 부자가 아니라 알거지가 되고 만다. 그리고 다시 부자로 복귀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과부를 칭찬하시는 까닭이 무엇일까? 두 닢 모두를 넣었기 때문이다. 한 닢이라면 쉽다. 넣거나 넣지 않거나 하면 된다. 그런데 두 닢이 되면 생각이 달라진다. 한 닢만 넣고, 한 닢은 나를 위해 남겨 놓고 싶고, 그렇게 할 수 있다. 한 닢을 남겼으면 소박하게라도 그날 저녁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을 위해 남겨 놓으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서슴없이 아낌없이 하느님께 바쳤다. 어쩌면 그녀는 굶는 것을 밥 먹듯이 했는지도 모른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헌금함 중에는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헌금함도 있다. 가난한 과부는 구제 대상으로 그 구제 헌금을 받아야 마땅하다. 자신이 구제받아야 하는 대상이면서도 그녀는 자기가 가진 것 모두를 하느님께 바쳤다. 그녀에게는 하느님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자신은 굶으면서도 돈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주님께 바쳤다.

오늘날에도 이 가난한 과부처럼 사는 훌륭한 신앙인들이 많이 있다.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하느님이 자신의 전부인 신앙인,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칭찬하신다.

 

하느님 말씀을 공부하고 해석하며 가르치는 율법 학자는 하느님을 드러내기보다 자기를 내세우고, 하느님을 위하기보다 자기 이익을 위하여 악을 행하고 위선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하느님 말씀을 잘 알 수 없는 가난한 과부는 자신을 전부 내놓으며 하느님을 위해 살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 학자와 가난한 과부를 대조하시면서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를 물으신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느님을 버릴 것인가? 하느님을 위해 자신을 버릴 것인가?’

현세를 위해 사는 율법 학자가 될 것인가?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사는 과부가 될 것인가?’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