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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루카 12, 35-40) 시중드시는 하느님

세심정 2023. 1. 20. 16:41

새해의 첫날인 설은 묵은해를 정리하여 떨쳐버리고 새로운 계획과 다짐으로 새 출발을 하는 날이다. ''은 순수 우리말로써 그 말의 뜻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먼저 '서럽다'`'이다. 선조 때 학자 이수광이 `여지승람'이란 문헌에 설날이 '달도일'로 표기되었는데, ''은 슬프고 애달파 한다는 뜻이요, ''는 칼로 마음을 자르듯이 마음이 아프고 근심에 차 있다는 뜻이다. `서러워서 설 추워서 추석'이라는 속담도 있듯이 추위와 가난 속에서 맞는 명절이라서 서러운지, 차례를 지내면서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여 그렇게 서러웠는지 모르겠지만, 설이란 서럽다.’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다음은 '사리다'[, 삼가다.]`'에서 비롯했다 설()이 있다. 각종 세시기들이 설을 신일(愼日)이라 하여 '삼가고 조심하는 날'로 기술한 것도 몸과 마음을 바짝 죄어 조심하고 가다듬어 새해의 첫 시작을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옛날 문헌들에 정초에 처음 드는 용()띠 날 말()띠 날 쥐()띠 날 돼지()띠 날 그리고 2월 초하룻날을 신일(愼日) 로 적혀 있음을 근거로 하여 육당 최남선이 풀이한 기원설이다. 새해부터 처음 맞이하는 십이일을 상십이지일(上十二支日)이라 하여 여러 가지를 삼가며 조심할 것을 가르친 풍속이 있는 걸 볼 때, 매우 타당한 설이다.

 

`'의 어원에 대해 또 다른 견해는 나이를 댈 때 몇 살... 하는 ''에서 비롯된 연세설이다. 한국말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우랄 알타이어계에서 해가 바뀌는 연세를 '(산스크리트) (퉁구스) (몽고)'이라 한다. 산스크리트 말에서 `'은 두 가지 뜻이 있는데 그 하나는 해가 돋아나듯 '새로 돋고 새로 솟는다'는 뜻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시간적으로 이전과 이후가 달라진다는 구분이나 경계를 뜻하고 있다. 이 모두 정초와 직접 연관되고 있다. 중국의 어원사전인 `청문엽서'에 보면 연세를 나타내는 `'`'은 세()()()()를 뜻하고, 또 대나무나 풀이나 뼈마디를 뜻하는 절()의 어원이라고도 했다. '몇 살 몇 살' 하는 `'이 그 연세의 매듭()을 짓는 정초를 나타내는 `'로 전화되었으리라고 추측한다.

 

또한 설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견해는 '설다. 낯설다' ''이라는 어근에서 나왔다는 설()이다. 처음 가보는 곳, 처음 만나는 사람은 낯선 곳이며 낯선 사람이다. 따라서, 설은 새해라는 정신문화적 시간의 충격이 강하여서 '설다'의 의미로, '설은 날'로 생각되었고, '설은 날''설날'로 정착되었다. 곧 묵은해에서부터 분리되어 새해로 통합되어 가는 전이과정에 있는 다소 익숙하지 못하고 낯 설은 단계라는 의미이다.

 

오늘 교회가 선택한 복음은 루카복음(12, 35-40)이다.

주님께서는 먼저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으라고 명령하신다. 허리에 띠를 매는 것은 옷을 잘 여미어 활동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준비하고 있으라는 명령이다. 등불을 켜 놓고 있으라는 명령은 혼인 잔치에 참석한 주인이 언제 돌아오든지, 밤늦게 돌아오더라도 주인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명령이다.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목표이며 목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시더라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살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든지, 아니면 우리가 그리스도께 가든지 간에 주님을 맞기에 합당한 준비를 하라는 말씀이다. “5분 후에 지구가 멸망한다면 당신은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나는 사과나무를 심겠습니다.”라고 대답한 철학자처럼, 자신이 하는 일이 종말을 맞이하기에 충분한 그런 삶을 살라는 말씀이다. 다른 하나는 새해를 시작하면서 언제 무슨 일이 생기든지 일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라는 의미이다. 미래를 설계하고 준비하며 살아가라는 가르침이다. 미래는 준비하는 사람의 몫이다. 그러므로 미래를 철저히 준비하라는 가르침이다.

 

둘째,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있는 종들이라고 말씀하신다.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주로 밤에 열렸다. 따라서 잔치가 길어지면 새벽에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종들은 그때까지 깨어있으면서 주인을 기다린다. 그처럼 깨어있으면서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 행복하다고 가르치신다. 종의 임무는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이다. 밖에 나간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종, 주인이 돌아오면 발을 씻겨주고 주인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를 제공하는 종, 그가 자기 임무에 충실한 종이다.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우리도 주님을 만나기 위해 깨어있으라고 가르치신다.

 

셋째, 주인은 그런 종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종이 자기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고 하여 식탁에 앉게 한 후 시중을 드는 주인은 세상에 없다. 오히려 주인은 종에게 시중을 들라고 한다. 그런데 종의 시중을 드는 주인은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주종 관계가 아니라 부자 관계이다. 주인은 종의 시중을 들지 않아도, 아버지는 아들의 시중을 든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시는가를 보여준다. 우리가 아들로서 충실하게 살아가면, 아빠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시어 식탁에 앉게 하고, 밥을 떠먹여 주신다. 그만큼 우리를 위해 봉사하신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가!

 

오늘 설날을 맞이하여 서럽고, 사리고, 삼가고, 낯설은 설이 아니라, 주님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 주님을 맞이하고, 미래를 설계하고 준비하는 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깨어있는 설, 주님을 충실히 맞이함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시중받는 그런 설이 되도록 하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시어 우리에게 밥을 떠먹여 주시는 아빠이심을 굳게 믿고, 하느님께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