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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밤 미사(루카 2, 1-14) 영광과 평화

세심정 2023. 12. 22. 15:51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수많은 천사가 나타나 하느님을 찬미하며 부른 노래다. 구세주의 탄생이 하느님께는 영광이며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이들에게는 평화를 준다. 오늘 그 평화가 우리 모든 교우님께 가득하길 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호적 등록을 하기 위해 요셉 성인은 조상 다윗의 고향인 유다 지방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는데, 약혼한 마리아도 함께 갔다. 로마는 세금 징수를 위해 인구 조사를 했는데, 로마의 법에 따르면 남성이나 여성 모두 자신이 사는 곳에서 등록하면 되었다. 유대가 실시하는 호적 등록이 아니라 로마가 실시하는 호적 등록이기 때문에 요셉 성인은 굳이 베들레헴에 갈 필요가 없었다. 나자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144km나 되는 먼 거리이다. 만삭인 성모님이 그 먼 거리를 가시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걷기도 힘들고, 나귀를 타고 가기도 힘들다. 밤낮의 기온 차도 심하고, 쉬거나 잘 곳도 찾기 어렵다. 그런데도 요셉 성인은 성모님과 꼭 함께 가야 했을까? 성모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성모님의 잉태에 대해 수군거리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성모님을 보호하기 위해? 성모님을 보호하기 위해? 그 어떤 인간적인 해석도 합당하지 않다.

답은 오직 한 가지, 하느님의 섭리다. 로마 황제가 호적 등록을 하도록 한 것이 세금 징수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모르는 그를 통하여 그러나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미카 5, 1)라는 예언이 이루어지도록 하셨다. 구세주께서 당신 자신을 음식으로 내어주시는 빵으로 오시기에 빵집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야만 했다. 악을 통해서도 선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한 당신 섭리로 구세주를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도록 이끄셨다. 그래서 요셉 성인이 만삭의 성모님과 함께 그토록 먼 거리를 걸어 베들레헴에 가셨다. 요셉 성인도 왜 그 먼 거리를 걸어가야 하는가를 알지 못하고도 갔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인도하심이며 섭리이다.

그러므로 고통과 역경이 올지라도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참고 견뎌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을 이끌어 가신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머무는 동안 성모님은 해산 날이 되어 아들을 낳았는데,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관이란 숙박업소 또는 일반 가정의 이층을 가리킨다. 보통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축을 집안에서 재웠는데, 가축은 아래층, 사람은 좀 더 높은 이층에서 잤다. 이층과 아래층은 완전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공간이다. 여하튼 숙박업소이거나 일반 가정이거나, 사람이 자는 곳에는 잘 곳이 없었기 때문에 성모님은 가축이 자는 곳에 머물며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여기서 묵상해야 할 점은 우리 마음이 비어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으로 가득 찬 여관에는 예수님께서 들어가실 틈이 전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어있는 곳으로 가셨는데, 그곳이 곧 가축들이 자는 곳이며, 외양간이다. 우리가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실 수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비움의 신앙, 케노시스의 신앙이다. 주님으로 채우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비우는 그곳에 주님께서 임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시어 강생하셨듯이, 우리도 자신을 낮추고 비우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 임하신다.

 

셋째, 태어나신 예수님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눕혀지셨다. 포대기는 누더기와 비슷하다. 주님은 너무나 가난하게 태어나셔서 누더기에 싸여 구유에 눕혀지셨다. 외양간에서 구유는 아기를 눕히기에 알맞다. 그런데 구유는 가축의 먹이통이다. ,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먹이로 세상에 오셨다. 빵집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어, 먹이통인 구유에 눕혀지셨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실 때,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몸과 피로 만드시어 제자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나누어주셨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먹이로 주시기 위해 오셨다. 우리가 주님을 먹음으로써 또 하나의 주님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 먹이로 세상에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늘 먹어야 한다. 말씀으로 주님을 먹고, 성찬으로 주님을 먹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주님이 되어야 한다.

 

넷째, 주님 탄생의 기쁜 소식은 누구보다도 먼저 목자들에게 전해졌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목자란 대단히 천시받는 사람으로 부정한 사람의 대명사였다. 그런데 성경에 정통한 율법 학자나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 레위인들, 그리고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던 신심 깊은 이들에게 메시아 강생의 기쁜 소식이 먼저 전해지지 않았고, 메시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던 이들에게 먼저 전해졌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봉헌해야 할 어린 양이었기 때문에 양을 돌보는 목자들에게 먼저 전해졌을 수도 있다. 그들이 하느님 체험의 장인 광야에서 밤을 지새우며 지내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유대 사회에서 가장 비천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리라. 하느님께서는 가장 비천한 자들까지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시어 구원하시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가난하고 비천함을 원망하고 한탄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가난하고 비천해지기를 원해야 한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듣기 위해, 더 낮아지고, 더 가난해져야 한다. 그래서 성인들은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가난을 선택했고, 자신을 철저히 낮추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강생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주님께서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강생하셨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강생하셨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동시에 평화를 누린다.  

 

이 밤 주님께서 강생하신 밤이다. 주님 강생의 세 가지 의미란 글을 보았다.

첫째, 주님께서 깊은 밤에 오셨다는 것은 깊은 밤과 같은 죄악 가운데 신음하는 사람들 가운데 오셨다는 것을 상징한다. 내면의 정신적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 불치의 병으로 절망하는 사람, 사랑에 목마른 사람, 물질적 가난으로 한숨 쉬는 사람, 가정파탄으로 방황하는 사람, 삶의 의미를 상실한 사람, 지은 죄로 인하여 쉼을 잃어버린 사람, 절대 불안과 절대 허무로 그 영혼이 여위어 가는 사람, 등등 그런 사람들에게 그 모든 부정적이고 죄악 된 짐을 풀어주시고 위로하시고 자유롭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음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깊은 어둠에 잠겨 죽어 가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오셨다.

 

둘째, 주님께서 빛나는 별로 오셨다는 것은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인생의 올바른 방향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상징한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별은 작게 보임을 두려워 않는다.”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아무리 작게 빛나는 별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별 자체는 어마어마하게 크고 밝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별이라도 별은 바다, 사막, 산에서 길 잃고 헤매는 사람에게 올바른 방향을 가르쳐주어 살길을 열어주듯, 예수님은 인생 여정에서 길 잃고 방황하는 사람에게 어디로 가야 살 수 있는지 그 올바른 방향을 가르쳐 주는 별빛으로 오셨다.

 

셋째, 주님께서 외양간에 오셨다는 것은 사람의 삶을 완전히 전환하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상징한다. 외양간은 가축의 똥, 더러운 냄새, 지저분한 쓰레기로 더러운 곳이다. 그런 곳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천사의 찬송, 동방 박사의 예물, 목자들의 경배가 어우러지는 영광된 곳으로 변화하였다.

내 옷도 나를 싫어할 만큼 더러운 죄악으로 가득한 나, 냄새나는 나, 지저분한 나, 우왕좌왕 헤매는 나, 야비하고 비열한 에고이즘으로 똘똘 뭉쳐진 나 같은 사람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시고 살기 시작하면 내 속에 있던 그 모든 더러운 것들이 변하기 시작하여 천사들, 동방 박사, 목자들과 같이 순수한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참고 견디자. 마음을 비워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계시도록 하자. 말씀과 성찬으로 주님을 먹음으로써 우리 자신이 주님이 되자. 주님을 모시기 위해 가난함과 비천함을 선택하자. 주님께서는 칠흑같이 어둠에 잠겨 헤매는 우리를 위해 빛으로 오셨다. 주님께서는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를 위해 빛나는 별로 오셨다. 주님께서는 온갖 죄악으로 더럽혀진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오셨다. 그러니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모든 믿는 이들이 평화를 누리는 거룩한 성탄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