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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대축일(요한 20, 19-23) 성령을 받아라

세심정 2024. 5. 17. 12:54

지난 주일은 주님 승천 대축일이었다. 머리이신 주님께서 승천하시어 하느님의 영광과 권세를 누리시므로 몸인 우리도 이미 하느님 영광과 권세를 누리고 있다. 승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며 우리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주셨으므로, 몸인 우리가 주님이 되어 성령 충만하여 구원의 복음을 전하자는 말씀을 드렸다.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이다. 1 독서는 제자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고 말하는데 여러 지방에서 모인 이들이 모두 자기 지방 말로 알아들음으로써 복음이 전파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2 독서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음을 강조한다. 복음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와 성령을 주시고, 죄의 용서를 선포하도록 사명을 주시는 대목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체험한 이들은 많지 않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몇 여인, 열한 제자,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 외 몇 제자, 사도 바오로,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1코린 15, 6) 등이다. 그런데도 복음이 불길같이 퍼져나간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오직 성령의 힘이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전이라기보다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활동하신 성령 행전이다.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는 어린아이에게서 마귀 한 마리를 쫓아내지도 못했지만(루카 9, 40), 성령을 충만히 받은 후(사도 2, 1-4) 태생 앉은뱅이를 일으키고(사도 3, 1-10), 많은 병자를 고치는 등 기적을 일으키며, 심지어 죽은 도르카스를 살리기까지 하였다(사도 9, 36-43). 성령께서는 사도들에게 치유와 기적, 구마, 심령 언어, 말씀, 지식, 지혜 등의 은사를 주시어 많은 기적과 이적을 일으키고, 사람들의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일으키시어 복음이 불길같이 퍼져나가도록 하셨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강림대축일을 교회의 창립일로 정하고 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성령 충만한 제자들이 성령께서 주시는 대로 말하는데, 그곳에 모인 16개 지방의 사람들이 모두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알아들었다. 이는 성령께서 그들 모두가 하나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죄의 결과는 분열이지만, 성령께서는 일치하게 하신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자, 하느님과 멀어졌고, 서로가 멀어졌으며, 땅도 멀어져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했다(창세 3, 18). 애초에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말을 사용했지만, 그들이 바벨 탑을 세워 하느님과 대적하려는 죄를 지은 결과 하느님께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음으로써 그들을 흩어 버리셨다(창세 11, 9). 죄는 먼저 자신과 멀어지게 하고, 나아가 이웃, 하느님, 자연과도 멀어지게 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모두 하나가 되게 하신다. 성령의 힘은 일치이다.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일치를 이루어주신다.”(에페 4, 3)

그러므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늘 기도하셨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 21)라는 기도는 대사제 기도의 핵심이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자기를 버려야 한다.

 

둘째,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던 제자들에게 오시어 가운데에 서신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붙잡히셨을 때, 제자들은 겁에 질려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가 달아났다(마태 26, 56). 베드로는 대사제의 관저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는데, 세 번째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했다(마태 26, 7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성모님과 여러 여인은 함께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만 함께했고, 다른 제자들은 아무도 함께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두렵고, 그들도 예수님처럼 붙잡혀 십자가형을 당할까 두려웠다.

그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셨고, 오시어 가운데에 서셨다. 주님은 그처럼 두려워 떨고 있는 우리, 주님을 버리고 도망친 우리, 죄에 빠져 주님을 떠나간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와 함께, 우리 가운데에 서 계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우리가 주님을 버리고, 주님으로부터 도망쳐도 우리를 찾아오신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힘을 주시며, 평화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신다. 주님께서는 그처럼 두려움에 떨고, 근심 걱정에 빠지며, 당신을 버리고 도망친 제자들, 죄에 떨어진 제자들을 꾸짖고 벌 주시기 위해 찾아오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힘과 위로를 주시고, 기쁨과 평화를 주시기 위해 찾아오신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자. 주님께서는 그처럼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조금 잘못하고, 부족하고, 허물이 크고, 죄를 짓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용기를 내자. 주님께서는 당신 사랑으로 나의 모든 허물과 죄를 감싸주심을 믿자.

 

셋째,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겁에 질려 있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듯이, 삶에서 여러 가지로 힘들고 어려워 근심 걱정이 가득한 우리에게도 평화를 주신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 27)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누릴 수 있는 평화이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에서도, 근심 걱정이나 고통 속에서도, 심지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면서도 누리는 평화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천국의 평화이다. 이 평화는 성령의 열매이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갈라 5, 22-25).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 성령의 열매인 평화를 누리면, 세상 문제가 더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두 해결된다. “사랑이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내며,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듯이”(1코린 13, 7-8) 평화는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넷째,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성령께서는 보호자이시다. 옆에 계시며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돌보아주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제자들은 기쁨과 용기를 가지고 복음을 전했으며, 시련과 박해는 물론 죽음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성령을 보내주셨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까닭이 보호자 성령을 보내시기 위함이다(요한 16, 7). 예수님께서 강생하신 까닭이나 성령을 보내신 까닭도 우리를 위하여서이다. 우리가 회개하고 죄에서 벗어나며,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축복받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하여서이다. 그래서 죄를 용서하고,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셨다.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처럼 교회도 죄인을 불러 용서하고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그런데 죄를 용서받지 않고 죄에 빠져 그 속에서 머무르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한 이들은 아무리 용서하려고 해도 용서받지 못한다. 믿음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다.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이하여 성령 충만한 삶을 살자.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따름으로써 하느님과 일치하자. 여러 가지 걱정, 두려움에 떠는 우리를 주님께서는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시며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다.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강생하셨고, 성령을 보내셨음을 기억하자. 그래서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살자.